김치의 역사
삼국 시대[편집]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도 채소 발효식품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도입되면서 채식이 유행하고, 발효 채소도 즐겨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편집]
1241년 간행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가포육영》이라는 시에 무로 담근 김치가 "漬(지)"로 기록되어 있다.
得醬尤宜三夏食。
漬鹽堪備九冬支。
根蟠地底差肥大。
最好霜刀截似梨。— 《家圃六詠》
장을 곁들이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넘긴다
땅속에 도사린 뿌리 비대해지면
좋기는 날 선 칼로 배 베듯 자르는 것— 《가포육영》
1478년 간행된 《동문선》에 수록된 이달충이 지은 《산촌잡영》이라는 시에는 여뀌에 마름을 섞어 소금절이(鹽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飯粗????雜稗
鹽漬蓼和萍— 《山村雜詠》
보리밥 그릇에 피가 반 섞이
여뀌풀 저림 속에 마름도 끼고— 《산촌잡영》
유교가 도입되고 복고주의가 유행한 고려 말기에는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菹(저)"라는 이름이 쓰였다.
조선 시대[편집]
1670년 간행된 《음식디미방》에는 동아를 절여서 담그는 소금절이 김치나 산갓을 소금 없이 작은 단지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붓고 뜨거운 구들에 놓아 숙성시키는 김치가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말 문헌인 《요록》에도 무, 배추, 동아, 고사리, 청태콩 등의 김치와 무를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 등 11종의 김치가 기록되어 있다.
신대륙 작물인 고추가 전래되기 전의 김치는 천초(초피), 산초, 호초(후추) 등 초(椒)라 불리는 향신료나 회향, 식초 등을 사용해 담근 소금물절이 김치였으며, 고추가 들어온 지 한 세기가 지난 1715년에 간행된 《산림경제》에도 소금에 절인 채소를 식초에 담그거나 고추가 아닌 다른 향신료와 섞어 만든 김치만 기록되어 있다.
1766년 《증보산림경제》에는 맨드라미로 김치에 붉은 물을 들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고추나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도 다수 등장한다.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채, 호박, 가지 등의 채소와 고추, 천초, 겨자 등의 향신료를 섞고 마늘즙을 듬뿍 넣어서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비슷한 김치를 담그는 방식이 "침나복함저법"으로, 오이의 3면에 칼자리를 넣고 속에 고춧가루, 마늘을 넣어서 삭혀 오늘날의 오이소박이김치와 비슷한 김치를 담그는 방식이 "황과담저법"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그밖에도 동치미, 배추김치, 동가김치, 전복김치, 굴김치 등이 소개된다.
19세기 초 간행된 《임원경제지》에서 서유구는 고추를 김치에 많이 쓰면 무가 더욱 오랫동안 저장된다고 기술하였다. 같은 책에서 소금에 절인 잎줄기가 달린 무에 오이, 배추 등 다른 채소, 청각채 등 해초, 고추, 생강, 천초, 마늘 겨자 등 향신료, 조기, 젓갈, 전복, 소라, 낙지 등 해산물, 산미완화제가 되는 전복껍질 등을 함께 버무려 젖산 발효시킨 섞박지가 "해저방(醢菹方)"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근·현대[편집]
과거에는 무가 배추에 앞서는 김치 재료였으나, 속이 꽉 찬 결구배추가 육종되고 널리 보급된 20세기부터 배추김치가 무김치를 압도하게 되었다.[2][3]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김치가 세계에 알려졌으며, 2001년 7월 5일에는 국제 식품 규격(Codex)에 김치가 등록되었다.